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 (문단 편집) == 역사 ==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내의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일대의 농민들이 캐나다로 많이 이주했다. 당시 유대인을 제외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이 무학 농민으로 미국보다는 농업 이민이 유리했던 캐나다로 더 많은 이민이 이루어졌다.[* 같은 이유로 러시아의 [[재세례파]] 신도 상당수가 캐나다로 이주했다.] 그와 동시에, 캐나다 정부가 캐나다 서부 내륙의 [[프레리]] 지역 [[https://en.wikipedia.org/wiki/Aspen_parkland|아스펜-파클랜드 벨트]]에 [[체르노젬]] 토양을 확인하면서 같은 체르노젬 토양이 많은 우크라이나 출신 농민들의 이민을 받아 노하우 도입 및 서부 개발 촉진을 꾀했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 상당기간 캐나다 이민 홍보 관료들이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우크라이나인 이민을 도왔고 이는 캐나다에 우크라이나계 인구가 유난히 많은 이유이자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 상당수가 전술한듯 서스캐처원, 알버타, 매니토바[* 캐나다의 프래리 지역]에 다수 포진한 이유이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려면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의 근현대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근현대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존속하는 동안 [[르비우|리비우]]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지방은 [[폴란드 분할]] 과정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가톨릭]]을 탄압한 러시아 제국과 다르게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는 [[정교회]]가 차별을 받았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역시 가톨릭이기는 해도 동방 정교회의 전례를 유지하는 차이에다 가난한 우크라이나계 농노들이 주로 믿는다는 이유로 심각한 차별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을 가난한 농업 지대에 총알받이용 병력 공급 지역 즈음으로 여겼으며, 갈리치아는 빈곤 문제가 심각해지고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간의 갈등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리치아 내 우크라이나인들은 특별한 기술이 있을 턱도 없고 그 때문에 농업 이민을 선호한데다, 차라리 춥더라도 평소에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았던 폴란드계나 유대계, 독일계랑 부딪힐 일이 적은 캐나다를 주 이민지로 택한 것. 특히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를 믿고 있던 갈리치아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캐나다 서부로 많이 이주했다. 이 갈리치아 지역의 빈곤은 19세기 후반에 특히 극심했는데, 해당 지역은 우크라이나 내 다른 지역들이 비옥한 [[흑토]] 지대인 것과 다르게 비교적 척박한 편이었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갈리치아 지역 주민의 소득 증대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는 동안 식량 생산은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해당 지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편입되고 중부-동부 지역이 러시아 제국으로 갈라지면서 전통적인 무역로마저 단절되었고 설상가상 별다른 공업 투자도 이루어지지 않자 도시에서도 잉여 노동력을 흡수하지 못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다른 지역 농민들보다 두 배 적게 먹는 대신 낙후된 농업 기술과 허약한 건강상태로 4분의 1 정도의 효율로 일하며, 농업 이외에 주 산업은 주류 양조 산업으로 농촌 내 알콜 중독이 만연하였다. 절망적이고 빈곤한 사회 분위기 속에 우크라이나계 농민 아동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15% 정도로 당시 오스트리아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서구 세계에는 아일랜드 대기근이 유명하다면 중유럽에서는 이른바 "갈리치아의 빈곤"이 기근의 대명사로 통했을 정도였다. 영양실조로 연간 5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기근과 알코올 중독으로 면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콜레라, 발진티푸스, 천연두 및 매독이 창궐해서 해당 지역의 평균 수명을 크게 낮추었다.]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 상당수는 이웃 폴란드인 농민들을 따라 아메리카로 대량 이민을 결정하였다. 갈리치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 정도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중 상당수가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다. 물론 우크라이나에서 캐나다로 이민한 사람들 중 일부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미국 이민을 좀 더 선호한 편이었지만, 캐나다 동부로 이주한 인구 역시 적지는 않았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캐나다 이주는 20세기 중엽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차대전 당시 캐나다는 연합군으로 파병하였고, 우크라이나계 이민자들의 명목상 출신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당시 동맹국에 속해있었는데 이러한 연유로 캐나다에서는 약 8,000여 명의 우크라이나계 이민자들을 친오스트리아파 위험 인물로 오해하여 강제 수용소에 수감하고, 노역을 시킨 흑역사가 있다.[[https://en.wikipedia.org/wiki/Ukrainian_Canadian_internment|#]]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약간의 배경 상식만 있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빼도막도 못할 캐나다의 흑역사이다.[* 이 외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 이민자들(대부분은 오스트리아인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인이나 세르비아인 등등 슬라브계) 8만여 명이 [[https://en.wikipedia.org/wiki/War_Measures_Act|캐나다 전시조치법]]에 의해 감시를 받았다.] [[소련]] 시절에는 캐나다로 망명하는 우크라이나인들도 있었지만, 소련 정부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의해 우크라이나 유대인들도 캐나다로 이주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소련 해체 이후에 독립국이 되었고, 우크라이나보다 캐나다가 훨씬 경제적인 수준이 좋은지라 경제적인 풍요를 찾아 캐나다로 적지 않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이주하고 있으며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주자가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2022년 캐나다 정부는 망명을 신청한 우크라이나인 70만여 명 중 40만여 명에게 난민 허가를 내주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628981?sid=10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